퀴즈풀이 썸네일형 리스트형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 (1991.2.13)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 (1991.2.13) 1992년 2월 19일 발효 -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 (전문) 남과 북은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뜻에 따라 7.4 남북 공동 성명서에서 천명된 조국 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고 정치, 군사적 대결 상태를 해소하여 민족적 화해를 이룩하고 무력에 의한 침략과 충돌을 막고 긴장 완화와 평화를 보장하며 다각적인 교류 협력을 실현하여 민족 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도모하며, 쌍방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정 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 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 더보기 (사료) 대한민국 헌법 대한민국 헌법 前文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자유민주적기본질서를더욱확고히하여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 더보기 박지원의 양반전 박지원의 양반전 양반이란 사족(士族)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정선군(旌善郡)에 한 양반이 살았다. 이 양반은 어질고 글읽기를 좋아하여 매양 군수가 새로 부임하면 으레 몸소 그 집을 찾아와서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이 양반은 집이 가난하여 해마다 고을의 환자를 타다 먹은 것이 쌓여서 천석에 이르렀다. 강원도 감사(監使)가 군읍(郡邑)을 순시하다가 정선에 들러 환곡(還穀)의 장부를 열람하고 대노해서 "어떤 놈의 양반이 이처럼 군량(軍糧)을 축냈단 말이냐?" 하고, 곧 명해서 그 양반을 잡아 가두게 했다. 군수는 그 양반이 가난해서 갚을 힘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기고 차마 가두지 못했지만 무슨 도리도 없었다. 양반 역시 밤낮 울기만 하고 해결할 방도를 차리지 못했다. 그 부인이 역정을 냈다. "당신은 평생 .. 더보기 중국사 연표 중국사 연표 이 자료는 운영자가 만든게 아니라, 참고 자료로 가져왔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한글 자료라 원문 출처는 모르겠네요. 7500경 裴李崗문화. 7000경 磁山문화, 大地灣 1기 문화. 6000경 河姆渡문화. 5000경 仰韶文化(半坡유형). 3500경 大汶口문화 2500경 龍山문화 2000경 夏문화(?) 1650경 商왕조 시작. 박에 도읍. - 二里頭 후기. 仲丁, 오(河南省 鄭州 ?)로 천도. 1400경 盤庚, 殷으로 천도. 1070경 武王이 周왕조 창건. 鎬京에 도읍을 정함 - 宗周. 成王, 周公이 召公의 보좌로 三監의 난 평정. 洛陽에 成周를 건설, 諸侯 封建. 懿王, 주왕조의 세력이 약화. 841 여왕이 추방되어 체로 망명. 14년간의 空位시대. 중국사상 최초의 실년대. 827 宣王이 주왕.. 더보기 중국사 40 - 황건적의 난과 후한의 멸망 중국사 40 - 황건적의 난과 후한의 멸망 이번 장에서는 후한말기 황건적의 난을 간략하게 다루겠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짧은 글이 되겠네요. 1. 황건적의 난의 사상 황건적이 일어난 이유는 후한시대 중앙과 지방에서 전면적으로 백성들을 압박하는 지배층 위주의 정치가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중앙에서는 어린 황제가 계속 등극하면서 국가적 차원의 실제 정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세금을 걷는 횟수만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환관들은 외척과의 싸움에 몰두하여 민생은 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호족들은 대토지를 사유화하여 백성들을 괴롭했습니다. 거기에 왕조말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천제지변과 기아, 홍수 등의 악조건들이 농민들을 토지에서 유리시키고, 농민들을 초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황건적의 난은 일단 음양오행사상.. 더보기 중국사 39 - 후한의 건국과 멸망에 대한 이야기 중국사 39 - 후한의 건국과 멸망에 대한 이야기 이번 장에서는 후한시대의 건국의 의미와 멸망까지의 역사를 한번 다루어보겠습니다. 후한은 기원 후 25년에서 220년까지의 왕조입니다. 1. 호족연합정권의 성립 왕망의 신이 지나친 국가통제적 정책을 실시하면서, 사회 전반의 모든 세력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호족들은 토지에 대한 규제 정책이 싫었고, 대상인들은 상공업 규제정책에 불만을 가졌으며, 농민들은 새로운 제도가 오히려 사회 불안을 부추기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왕망이 죽을 무렵 시작된 전국 각지에서의 농민 봉기는 수습이 안될 지경이었습니다. 특히 반왕복한(왕망을 죽이고 한을 부활하자)는 구호를 위친 적미의 난(붉은 눈썹의 난)은 중국 각지에 번지고 있었습니다. 이전까지 계속 이야기 했지만, .. 더보기 중국사 이야기 38 - 왕망의 신(AD. 8~23)도 역사적 의의가 큰 왕조였다. 중국사 이야기 38 - 왕망의 신(AD. 8~23) 이번 장에서는 짧지만 역사적 의의가 꽤 있는 왕망의 신나라에 대한 중요 개념들을 짧게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1. 신 건국의 배경 왕망은 외척출신입니다. 신이 건국된 배경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한나라의 내조와 외조가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투쟁하던 외척과 환관 세력의 다툼이 곧 신의 건국 배경입니다. 왕망은 이 싸움에서 환관을 몰아내고 외척으로서 새로운 나라인 신을 건국한 것이지요. 자세히 볼까요? 왕망의 이복동생인 왕씨가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엔 황후가 되어 버렸죠, 왕망과 그녀의 여동생인 황후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당시 왕인 성제는 황황후의 아들로서 왕망의 사촌이었습니다. 성제는 외척 중 4명을 뽑아 돌아가면서 정치를 하.. 더보기 중국사 이야기 37 - 한나라 시대의 제도사 : 중국엔 자사? 조선엔 관찰사! 중국사 이야기 37 - 한나라 시대의 제도사 이번 장에서는 중국 한나라의 정치 제도에 대하여 간략하게 포스트하겠습니다.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그냥 순서대로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 봅니다. 1. 한의 중앙제도 한나라의 제도는 진의 3공 9경제를 중심으로 합니다. 그러나 진나라와 같이 3공 9경이 황제권 강화에 이용되면서도, 상대적으로 그 권한은 약간 약화되는 쪽으로 제도정비 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3공의 역할 1. 승상 : 어사대부가 승상을 적극적으로 견제할 역할이 커져서 승상이 권한이 약화되었습니다. 2. 태위 : 군사권을 황제가 장악하려고 하여 태위의 군사권 기능이 약화되었습니다. 3. 어사대부 : 승상, 태위를 감시하는 기능이 대폭 강화되어 황제권과 좀 더 밀착됩니다. 바로 이 어사대부.. 더보기 중국사 이야기 35 - 한 무제 사후 내외조의 대립과 전한의 멸망 중국사 이야기 35 - 한 무제 사후 내외조의 대립과 전한의 멸망 이번 장에서는 한무제가 죽은 직후 황제권의 약화와 전한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어보죠. 1. 한무제가 만든 외조, 내조의 문제점 한무제는 자신의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기존 국가 지배 기구인 진시황제 이래의 외조를 통제하였습니다. 즉, 황제권에 도전할 수 있는 강력한 외조 기관인 3공을 통제한 것이지요. 따라서 승상(재상), 어사대부(감찰), 태위(군사)라는 삼권은 이전보다는 상당히 약화된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반면, 황제는 자신의 최측근에서 일할 수 있는 비서기관인 상서, 중서라는 기관의 의 권한을 느렸습니다. 무제는 자신들의 측근인 조신(상서, 중서, 중시)들과 국사를 의논하여 처리하였고, 이러한 황제 측근 기관을 흔히 라고 합니다.. 더보기 7번의 십자군 원정 : 후진 유럽이 아시아사회 수준으로 올라서다 7번의 십자군 원정 : 후진 유럽이 아시아사회 수준으로 올라서다 앞 포스트에서는 십자군 원정이 이베리아 정복과 시칠리아 정복사업 등이 바탕이 된 교황의 프로젝트 사업이라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럼 이제 실제로 십자군 원정 과정을 간략히 살펴볼께요. 1. 1차 십자군 1차 십자군은 교황 우르반 2세가 강력한 교황권을 바탕으로 가장 열정적으로 추진하였던 십자군입니다. 우선 선발대로 농민 십자군이 출정하였습니다. 이들은 교황의 말에 혹하여, 천국에 갈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혹은 토지를 얻기 위해서, 혹은 자유민이 되거나 부채를 감면받기 위해 예수의 고향으로 출정한 것이지요. 요즘 TV에서 나오는 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 때는 사회분위기가 모두 십자군 출정에 대한 환상적 광고를 때리는 분위기였습니다.. 더보기 이전 1 ··· 129 130 131 132 133 134 135 ··· 22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