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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남사 이맥전 왜국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남사 이맥전 왜국 왜국은 그 조상과 그 나라가 있던 곳은 이미 북사에 자세히 씌어 있다. 그들의 벼슬 이름을 보면, 우선 이지마가 있고, 그 다음은 마마획지요, 또 그 다음은 노가제이다. 그 나라 사람들은 벼와 삼을 심어 누에를 쳐서 길쌈을 한다. 또 생강과 계피, 귤, 고추, 소엽 등이 난다. 그 밖에도 검은 꿩과 진주, 푸른 옥 등이 난다. 짐승으로는 소처럼 생긴 것이 있는데, 이것을 산서라 하고 또 큰 뱀이 있는데 이 짐승을 잡아 먹는다. 뱀의 가죽은 단단해서 칼이 들어가지 않는다. 뱀의 위쪽에 구멍이 있는데, 이것이 금시에 열렸다가 금시에 닫히고 때로는 혹 빛이 나기도 한다. 이 구멍을 활로 쏘아 맞히면 뱀이 죽는다. 이 지방에서 나는 물건은 대략 담이, 주애와 .. 더보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남사 이맥전 신라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남사 이맥전 신라 신라는 그 조상의 일은 이미 북사에서 자세히 썼다. 그 나라는 백제 동남쪽 오십여 리에 있는데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임해 있고, 남북쪽은 구려. 백제와 연접되어 있다. 이 나라를 위나라 때에는 신노라 했고, 송나라 때에는 신라라 했으며, 혹은 사라라고도 했다. 그 나라는 몹시 작기 때문에 사신을 보내 오지도 못했다. 양나라 보통 이년에 왕 태가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백제 사신을 따라서 방물을 바쳐 왔다. 그들은 풍속이 성을 건모라 했다. 그 읍은 안에 있는 것은 탁평이라 했고, 밖에 있는 것은 읍륵이라 했으니 이것은 역시 중국의 군, 현과 같은 것이다. 그 나라에는 탁평이 여섯이 있고, 읍륵이 오십이개가 있다. 토지는 살찌고 아름다와서 오곡을 가꾸기에 .. 더보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남사 이맥전 백제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남사 이맥전 백제 백제는 그 조상은 동이였다. 세 한국이 있었으니 즉 첫째는 마한이요, 둘째는 진한, 세째는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열 두 나라이고, 마한은 오십사개국이나 있었다. 이들 중에 큰 나라는 인구가 만여 호나 되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밖에 되지 않아서 도합 십여만 호나 되었으니 백제는 그 중의 하나였다. 그 뒤에 나라가 점점 강대해져서 여러 조그만 나라들을 통합했다.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 천여 리 밖에 있었다. 진나라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해서 차지하고 백제도 역시 요서를 점령해 가졌었다. 이리하여 진나라는 두 군의 땅을 평정하고 스스로 여기에 백제군을 두었었다. 진나라 의희 십이년에 백제왕 여영으로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 더보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남사 이맥전 고구려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남사 이맥전 고구려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 리 밖에 있다. 그 조상의 내력은 북사에 자세히 씌어 있다. 땅이 이천 리나 되고 나라 가운데에는 요산이 있는데 요수가 여기서부터 흘러 나왔다. 남쪽은 조선, 예맥과 인접되어 있고, 동쪽은 옥저와 연결되어 있으며, 북쪽은 부여와 인접되어 있다. 그 나라 왕은 환도산 밑에 도읍을 정하고 산다. 땅은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판이나 못은 없어서 백성들이 산을 의지해서 살며 시냇물을 마신다. 아무리 대대로 내려오면서 살기는 해도 좋은 밭이 없기 때문에 그 나라 풍속은 먹는 것을 절약하고 궁실 수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는 집 좌편에 크게 집을 세우고 귀신에게 제사를 드리며, 또 영성과 사직에게도 제사를 드린다. 사람의 성.. 더보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남사 이맥전 서문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남사 이맥전 서문 동이의 모든 나라 중에서는 조선이 제일 크다. 그들은 기자의 감화를 받아 그들이 쓰는 기물들이 오히려 예악의 법도가 있다고 한다. 위나라 때 조선 동쪽은 마한, 진한의 붙이로서 때때로 중국과 통하여 진나라가 강을 건넌 뒤로부터 바다를 건너 사신을 보내 왔다. 또 고구려와 백제가 잇는데, 이 나라들은 송나라, 제나라 사이에 항상 조공을 바쳐 왔으며, 양나라가 일어난 뒤로부터 더욱 더했었다. 부상국은 옛날에는 듣지 못하던 것인데, 양나라 보통년간에 도인이 저쪽으로부터 왔으며, 그 말은 원본에 더욱 자세히 실려 있기로 이것도 겸해서 여기에 기록해 둔다.(南史)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 더보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수서 북적전 거란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수서 북적전 거란 글안의 조상은 고막해와 종족은 다르나 유는 같다. 모두 모용씨에게 망해서 함께 나무 사이에 숨었다가 그 뒤에 차츰 커져서 황룡 북쪽 수백 리 되는 곳에 산다. 그들의 풍속은 대개 말갈과 비슷하다. 도둑질을 좋아하고, 부모가 죽어서 슬피 우는 자는 씩씩하지 못하다고 한다. 다만 그 시체를 산 꼭대기 나무 위에 놓아 두고 삼년을 지난 뒤에 비로소 그 뼈를 거두어다가 불 태워 버린다. 이 때 술을 땅에 부으면서 빌기를, [겨울날에 때로 따뜻한 곳을 향해 만일 내가 사냥을 하게 되거든 나로 하여금 돼지와 사슴을 많이 잡게 해주시옵소서] 한다. 그들은 무례하고 사납고 시끄럽기가 모든 오랑캐들 중에서 가장 심하다. 후위 때를 당하여 그들은 고려에게 침략을 당해서 .. 더보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수서 동이전 왜국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수서 동이전 왜국 왜국은 백제와 신라 동남쪽으로 바다와 육지로 삼천 리를 간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모두 산을 의지하고 산다. 위나라 때 중국에 사신을 보내 서로 통하고 지낸 나라가 도합 삼십여 나라가 되는데, 이들은 모두 제각각 왕이라 일컬은다. 이 사람들은 잇수를 알지 못하고 다만 날수로 따진다. 그 나라 국경은 동쪽과 서쪽의 거리는 다섯 달을 가야 하고, 남쪽과 북쪽의 거리는 석 달이 걸린다. 이 모든 나라는 모두 바다에 닿아 있고, 그 곳의 지형은 동쪽이 높고 서쪽은 낮은데, 야미퇴에 도읍을 정하고 있으니 이곳은 위지에 말한 야마대이다. 옛날에는 말하기를, 이 곳은 낙랑군 경계와 대방군과의 거리가 모두 일만이천 리가 된다고 했다. 회계 동쪽에 있어 담이와 서로.. 더보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수서 동이전 말갈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수서 동이전 말갈 말갈은 고려 북쪽에 있다. 부락마다 모두 추장이 있어 서로 통일되지 않은 것이 대체로 일곱 종족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이름을 율말부라고 하는데, 고려와 서로 인접해 있다. 이곳은 군사가 수천 명이 있어 모두 날래고 씩씩해서 매양 고려를 침입하곤 했다. 둘째는 백줄부라고 하는데, 율말 북쪽에 있고 군사가 칠천 명이 있다. 세째는 안차골부로서 백졸부 동북쪽에 있고, 네째는 불열부로서 백줄부 동쪽에 있고, 다섯째는 호실부로서 불열부 동쪽에 있다. 여섯째는 흑수부로서 안차골부의 서북쪽에 있고, 일곱째는 백산부로서 율말부의 동남쪽에 있다. 이들은 군사가 모두 삼천 명에 지나지 못하지만, 그 중에서 흑수부가 가장 굳세고 건장하다. 불열부로부터 동쪽은 화살을 모.. 더보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수서 동이전 신라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수서 동이전 신라 신라국은 고려 동남쪽에 있으니 한나라 때는 이곳이 낙랑 땅이고 혹은 이것을 사라라고 한다. 위나라 장수 무구검이 고려를 쳐서 깨치자 그들은 옥저로 달아났다가 그 뒤에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여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던 자들이 드디어 신라가 되었다. 그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모두 섞여 살아서 중국 사람도 있고, 고려와 백제 사람들도 있다. 땅은 옥저, 불내, 한예의 땅을 모두 차지해 갖고 있었다. 그들의 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니 바다로부터 도망해서 신라로 들어가서 드디어 그 나라에서 왕노릇을 하고, 왕위를 전해 나가서 진평에까지 이르렀다. 개황 십사년에 사신을 보내서 공물을 바치자 고조는 진평을 배하여 상개부낙랑군공 신라왕을 삼았다. 그 조상은 백제에 .. 더보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수서 동이전 백제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수서 동이전 백제 백제의 조상은 고려국에서 나왔다. 그 나라 왕에게 부리는 종 하나가 있었다. 이 종이 졸지에 태기가 있자 왕은 죽이려 했다. 그러나 종은 말하기를, [마치 닭의 새끼 같은 물건이 와서 저의 몸에 스치더니 이내 태기가 있는 것입니다] 한다. 이 말을 듣고 왕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더니 뒤에 드디어 한 남자 아이를 낳았다. 이것을 변소에 버렸으나 오래 되도록 죽지 않으므로 이상히 여겨 신이라 하고 어미에게 명하여 기르게 하고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동명이 자라자 고려왕은 이를 꺼려하였다. 동명은 두려워서 도망하여 엄수에 이르니 부여 사람들이 함께 그를 받들었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라는 자가 있어 어진 일과 믿음에 독실하여 비로소 그 나라를 대방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