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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신라 공격 시 왜의 지원 백제의 신라습격과 왜의 지원 신공 49년 3월 황전별과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탁순국(대구, 창원쪽의 가야국가)에 이르러 신라를 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군사가 적어 신라를 깨뜨릴 수 없다는 의견이 있어, 사백과 개로를 보내 군사를 늘려달라고 요청하니, 즉시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에게 명하여 정예군을 거느리고 사백, 개로와 함께 가도록 하였다. 모두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서 깨뜨렸으니,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 7국을 평정하였다. 그리하여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고해진(전남 강진)을 돌아 남쪽 오랑캐 침미다례(전남 해남)를마구 죽이고 이를 백제에게 주었다. - 니혼쇼키 권9, 신공황후기 49년 3월 - 사료해석 : 이 내용은 4세기의 상황을.. 더보기
백제의 불교 수용 백제의 불교 수용 에 이런 말이 있다. 제 15대 침류왕이 즉위한 갑신년(384)에 인도 중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오니, 그를 맞이하여 궁중에 두고 예로써 공경하였다. 이듬해 을유에 새 서울 한산주에 절을 짓고, 중 10명을 두었으니 이것이 백제 불법의 시초인 것이다. - 삼국사기 권 3, 난타벽제 - 사료해석 : 백제의 불교수용에 대한 증거 사료입니다. 더보기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를 통한 정보전(007을 능가하는 첩보전이 있었네요) 고대 사회의 정보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치려고 간첩으로 갈 수 있는 자를 구하였다. 이 때 승려 도림이 응모하였다. 왕은 기뻐하여 비밀리에 보내어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 죄를 짓고 도망온 것처럼 하고 백제로 들어왔다. 이 때 백제왕 근개루(개로왕)는 바둑을 좋아하였다. 왕이 도림을 불러들여 바둑을 두었더니 과연 국수었다. 그래서 그를 상객으로 받을어 매우 친근히 하였다. 어느 날 도림은 왕을 모시고 있다가 조용히 말하였다. 왕이 이를 옳다고 여겨 국인을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 등을 지었는데, 모두가 장대하였다. 이 때문에 창고는 비고 인민은 가난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이 달걀을 쌓아놓은 것보다 위태로왔다. 도림이 도망하여 이 사실을 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여 백.. 더보기
백제 건국기의 정복 전쟁 백제초기의 정복전쟁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 8월에 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도를 알리고 영토를 명확히 정하였는데, 북으로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 웅천에 이르렀으며 서로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 주양에 이르렀다. 24년 7월에 왕이 웅천책을 만드니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꾸짖어 말하기를, 라 하니, 왕은 부끄러이 여겨 그 책을 헐었다. 26년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 하고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마침내 국읍을 병합하였는데, 다만 원산과 금현 두 성을 고수하여 함락하지 못하였다. 27년 4월에 두 성이 투항하여 그 인민들을 한산의 북으로 옮기니 마한은 마침내 망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1 - 근초고왕 26년(371)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오니, 왕이 듣고 패하 강변에 군사를 매복.. 더보기
백제의 관등 제도 백제의 관등 제도 27년(260) 봄 정월에 내신좌평을 두었는데, 왕명 출납 일을 맡았다. 내두좌평은 창고와 재정 일을 맡았고, 내법좌평은 예법과 의례 일을 맡았고, 위사좌평은 왕궁을 지키는 군사 일을 맡았고, 조정좌평은 형벌과 감옥 일을 맡았고, 병관좌평은 지방 군사 일을 맡았다. 또 달솔, 은솔, 덕솔, 한솔, 나솔과 장덕, 시덕, 고덕, 계덕, 대덕, 문독, 무독, 좌군, 진무, 극우를 두었다. 6좌평은 모두 1품이요, 달솔 2품, 은솔 3품, 덕솔 4품, 한솔 5품, 나솔 6품, 장덕 7품, 시덕 8품, 고덕 9품, 계덕 10품, 대덕 11품, 문독 12품, 무독 13품, 좌군 14품, 진무 15품, 극우 16품이었다. 2월에 명령을 내려 6품 이상은 자주색 옷을 입고 은꽃으로 관을 장식하게 하였.. 더보기
백제의 부역, 노역, 사역 제도 백제의 노역 제도 도림은 말하기를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다 산악과 강 및 바다로 되어 있으니 이는 하늘이 마련한 힘지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형상이 아닙니다. 이웃 나라들도 감히 넘볼 마음을 두지 않고 다만 받들어 섬기기를 원할 따름이온즉, 왕께서는 마땅히 높은 위엄과 막대한 부를 한껏 보여 사람들의 눈과 귀를 놀라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성곽과 궁궐은 수리하지 않고 선왕의 해골은 텅빈 들에 허술하게 묻혀 있으며 백성의 집들도 자주 강물에 무너지니 신은 대왕을 위하여 저으기 안타깝게 여기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렇다, 내가 장차 마련하리라' 하고 백성을 모두 동원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곧 그 안에 으리으리한 궁실, 누각, 망루를 지었다. 또 큰 돌을 욱리하(한강)에서 가져와 .. 더보기
백제인의 형벌 제도 백제의 형벌 제도 부인이 간음을 하면 그 여자를 남편 집의 종으로 삼는다. - 주서 이역열전 백제 - 사람을 죽인 사람은 노비 3명을 바쳐야만 죄를 면한다. - 구당서 동이열전 백제 - 형벌을 보면 모반하거나 전쟁에서 퇴각한 자 및 살인을 한 사람은 참수하였다. 도적질한 사람은 유배시키고 도적질한 물품의 2배를 물어 내게 하였다. 부인으로서 간통죄를 범하면 남편 집의 계집 종으로 삼았다. - 주서 이역열전 백제 - 사료해석 : 교과서에 나와있는 백제인의 형벌 죄입니다. 1책 2배 보상이라던가, 전쟁에 퇴각하면 참수한다던가라는 내용 등이 교과서에 실려있습니다. 더보기
백제의 농법 - 두락법 백제의 농업 자료 2월, 나라 남쪽 주군에 영을 내려 남쪽 습한 곳에 논을 만들게 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l 다루왕 6년 - 2월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고, 3월에 다시 명령을 내려 농사를 권장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2구수왕 9년 - 나라 사람들에게 명하여 남쪽 평야에다 논을 개간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2고이왕 9년 - 비로소 벽골지를 만드니 둑의 길이가 1.800보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홀해 이사금21년 - 정월, 명령을 내려 제방을 튼튼히 하고 국내의 떠돌아다니는 자들을 모아서 농사를 짓게 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4무령왕 10년 - 4월, 우두성에서 사냥을 하다가 우박을 만나 중지하였다. 5월, 가물었다. 왕은 좌우와 더불어 임유각에.. 더보기
일본으로의 불교 전파 - 노리사치계 노리사치계 백제 성명왕(聖明王) 이 서부(西部)의 희씨(姬氏) 달솔(達率)인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 등을 보내어 석가불금동상 1구와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 권을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불법을 유통시키고 예배하는 공덕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였다. "이 법은 여러 법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우니,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라도 오히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법은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복덕(福德)과 과보(果報)를 생겨나게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위 없는 보리(菩提)를 이루게 합니다. ··· 이로 말미암아 노리사치계를 보내어 황제의 나라를 받드니, 기내(畿內)에 유통하시어 부처가 '나의 법이 동쪽으로 흘러갈 것이다'라고 한 가르침을 이루십시요" - 니.. 더보기
백제 - 아직기와 왕인 아직기와 왕인 15년 가을 8월 임술의 첫 정묘일에 백제왕이 아직기를 보내어 좋은 말 2필을 바쳤다. 그래서 카루의 산비탈 위에 있는마구간에서 길렀는데, 아직기가 사육을 맡았다. 때문에 말 기르는 곳을 우마야사카라고 한다. 아직기는 또 경전(經典)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인 우지노와키이라쯔코(?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 때 천황이 아직기에게 "혹 너보다 뛰어난 박사가 있느냐"고 물으니, 왕인(王仁)이란 자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카미쯔키노노키미(上毛野君)의 조상인 아라타와케(荒田別)과 카무나키와케(巫別)을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불렀다. 16년 2월에 왕인이 왔다. 태자 우지노와키이라쯔코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여러 전적(典籍)들을 배웠는데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 니혼쇼키 권 10, 응신천황 1..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