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보기

오페르트 도굴사건 오페르트 도굴사건 그들의 유골을 잠깐이나마 점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진 자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할 것이며, 서울을 점령하는 것과 다름없는 의의를 가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원군은 그것을 돌려받기 위해서 누구에게든 두말할 것 없이 어떤 일에도 찬성할 것이다. 그러면 그를 강요하여 제안된 조건을 수락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대원군을 강요하여 이 요구를 수락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이것뿐이라는 것이다. - 오페르트,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 - 사료분석 : 1868년(고종 5) 오페르트(E. J. Oppert:1832~?)가 충청도 덕산에 있는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에 관한 사건입니다. 오페르트는 중국 상하이를 근거로 활동하던 유태계 독일상인.. 더보기
홍경래의 난 중 홍경래의 격문 홍경래의 격문 평서대원수가 급히 격문을 띄워 알리니라. 무릇 관서 지방은 단군 조선의 단정이었고, 양난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 난 자랑스러운 곳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 땅을 천시하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현재의 국왕은 나이가 어려 외척 권신의 농단으로 정치가 어지럽고 인민은 도탄에 빠져 헤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 홍경래의 격문 중 - 사료분석 : 1811년 12월 22일에 선포된 반란군의 격문을 보면, 지방적 차별대우를 반대하는 평안도 몰락양반·토호들의 요구가 강력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안동김씨 일문의 세도정치가 민의 생활에 끼친 폐단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으며, 조선왕조 멸망의 불가피성과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는 것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격문을 보면 농.. 더보기
광개토대왕 비문 전문 해석 광개토대왕비문 해석참조 : http://myhome.naver.com/sial/sss.htm 제 1부. 오직 옛날 시조는 추모왕이시니 창업의 기초를 닦으셨느니라.. 출생하여 스스로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라 하였다. 어머니는 하백녀이다. 랑부란(사내부족 아이)이 내려와 세상에 태어나니 성스러움이 있었다. 0000 이름을 駕(가)라 하였다. 순행하여 돌아다니다 남쪽 아래의 길에서 부여 엄리에서 큰 물(홍수)로 말미암아 왕으로 임하였다. 나루에서 말씀하여 가로되 “나는 바로 임금이니 하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하백녀이고 郞 부족의 추모왕이라 한다. 나를 건너가게 이어 주시오.” 거북이 떠올라 소리를 쳐 응하는 즉 허락하였음이다. 쭈욱 이어서 건널 수 있도록 거북은 떠 있었다. 그리하여 뒷날 비류곡을 건널 수 있.. 더보기
염사치 사화 염사치의 사화 王莽(왕방) 지황년간(地皇年間) 서기 20~23년에 염사치가 진한우거수(右邊渠帥)로 있을 때 낙랑의 토지가 기름지고 인민이 다 잘 산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투항(歸化)하려 하여 자기의 읍락(邑落)을 탈출(脫出), 순망중(巡亡中), 밭 가운데 새(雀)를 쫓는 한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의 용어가 한인과 다르므로 이유(理由)를 물으니, 남자가 말하되, "우리는 본래 한인인데, 나의 이름은 호래(戶來)라 한다. 우리들 1천5백인이 재목을 벌채하다가 한인에게 잡히어 머리를 깍고 종(奴隸)이 된지 3년이 된다" 라고 하였다. '치( )'가 이르되 내가 지금 낙랑에 투항하러 가는 중이니 너도 같이 가지 아니 하려느냐?하매 호래는 좋다고 하였다. 호래를 데리고 낙랑 함자현(合資縣)에 이르러 사유(事由).. 더보기
김종직의 무오사화, 조의제문 김종직에 대한 논평_무오사화 역사를 담당하는 관리가 논평한다. "김종직은 경상다 사람이다. 학문이 뛰어나고, 문장을 잘 지으며, 가르치기를 즐겼다. 그에게 배워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이 많았다. 경상도 선비로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들은 그를 우두머리로 모셨다. 스승은 제자를 칭찬하고 제자는 제 스승을 칭찬하는 것이 정도에 지나쳤다. 조정에 새로 진출한 무리는 그른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함께 어울리는 자가 많았다. 그 때 사람들이 이를 비판하여 경상도 선배 무리라고 하였다. - 성종실록 - 사료분석 : 무오사화에 배경이 된 것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입니다. 김종직은 사림으로서 3사에 진출하여 훈구와 대립하였습니다. 특히 김종직은 유향소를 바탕으로 한 경상도 사림의 결집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곧 지방의 중소지주층으.. 더보기
환상의 커플로 만들어 본 플래시 모션트윈 영상은 플래시 파일이 크기가 큽니다 - 로딩시간 10초 정도만 기다려주세요. 환상의 커플... 감동이였습니다. 나상실... 끝나지 않을 감동!!! 장철수랑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라나.... 더보기
조일 통상 장정 조일 통상 장정 12관. 수출입하는 물품에 대해 관세의 과세 표준은 종가세로 한다. 18관. 항구에서 관세를 완납한 물품은 내지에서 운송세 또는 내국통과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31관. 톤 세는 종량세로 징수하되, 톤 세 수입은 각 항구의 수리와 등대 및 초표의 설치에 사용한다. 37관. 만일 조선국이 자연 재해나 변란 등으로 말미암아 국내의 양곡이 부족해질 염려가 있어서, 조선 정부가 잠정적으로 양곡 수출을 금지하려고 할 때는, 그 시기보다 1개월 앞서 지방관으로부터 일본 영사관에 알리고, 또 일본 영사관은 그 시기보다 앞서 각 개항장의 일본 상인에게 알려 일률적으로 준수하게 한다. 참고글 : 일본과의 경제 교류가 일방적 교류가 된 결정적 계기인 통상 장정입니다. 특히, 양곡 수출 금지를 1개월 앞서 지.. 더보기
조영 수호 통상 조약 조영 수호 통상 조약 제 1관 1. 대조선국 대군주와 대영국 대군주 애란국(愛蘭國) 겸 인도국의 연합왕국여제폐하 및 그 후대사군(後代嗣君)과 그 인민으로 더불어 피차간 영원한 평화와 우의가 있을 것이며 차국인이 피국에 가면 그 나라에서 반드시 생명, 재산, 안정의 보호를 받는다. 2. 체약국의 일방과 제3국간에 분쟁이 야기(惹起)되는 경우에는 만약 청원할 경우 체약국의 타방은 타협을 초래하기 위하여 조정에 노력한다. 제 2관 1.조선과 영국은 양국의 수도에 영구적으로 혹은 일시적으로 외교대표를 임명 주재(駐在)시키며 외국무역을 하는 타방의 항구 또는 장소의 일부 또는 전체에 총영사관, 영사관 혹은 부영사관을 임명하여 주재시킬 수 있다. 양국의 외교대표 및 영사관들은 타국의 외교관 및 영사관들이 가지는 모.. 더보기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조미수호 통상 조약 제 1조 사후로 대한조선군주와 대아미리가(大亞美理駕)합중국'프레시덴트' 및 그 인민은 각각 영원히 화평우호를 지키되 만약 타국이 불공경모(不公輕侮)하는 일이 있게 되면 일차 조지(照知)를 거친 뒤에 필수상조(相助)하여 잘 조처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한다. 제 2조 본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양 체결국은 각각 병권대신을 파견하여 다른 한쪽 국가의 수도에 주재시킬 수 있고 또 각각 통상항구에 영사관을 설치하되 이는 자국의 편의에 따른다. 이들관원은 본지의 관원과 더불어 왕래교섭하되 동등한 품급에 상당한 예우로써 응대한다. 양국의 병권대신 및 영사 등의 관헌은 종종(種種)의 은시(恩施)와 피차의 접대에 다름이 없는 최우국(最優國) 특권을 향획(享獲)한다. 오직 영사관은 반드시 봉도(奉到)한 .. 더보기
1880년대 중반 일본의 경제 침투 일본의 경제 침투 문을 지키는 것을 혁파한 뒤 다시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번만하기는커녕 왜관에 모여들어 큰 장시를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매번 절도의 우려가 있고 일본 상인들은 잃어버린 물건이 있으면 곧 공간에 돌려달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폐의 일단입니다. 관리관의 감독 아래 공간에서 무역하는 외에도, 그들(일본인)은 유상이라 말하고 10명이나 7-8명씩 무리를 지어 성부안을 빈번히 오가는데 그 행로가 30리나 됩니다. 장사하는 아녀자를 만나면 문득 소리쳐 놀라게 하여 창황하여 도망하게 합니다. 성안에 사는 사람은 두려워 겁나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며 뱀과 벌레보는 것처럼 하여 진실로 민망합니다. 또한 그들이 왕래할 때, 우리나라 아동은 소리지르며 무리를 지어 그들을 따라가 어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