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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중세의 미술 - 2. 게르만과 프랑크 왕국의 미술 중세의 미술 - 2. 게르만과 프랑크 왕국의 미술 이 글에 대한 원문 포스트 : http://blog.naver.com/tori2984?Redirect=Log&logNo=10013241401 위 블로그를 클릭하시면 유럽 미술사에 대한 많은 자료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너무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위 사이트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제가 정리하는 것보다 100배는 나은 듯 하네요. 역시 제 사이트는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해요. ------------------------------------------ 원문 : 중세를 흔히 암흑기라고 부르곤 했지만 이 또한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중시한 르네상스인들이 신중심적인 중세를 비하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실제의 중세는 지중해 중심의 라틴민족과 유럽북방의 게르만민족이 융합하.. 더보기
중세의 미술 - 1. 초기 기독교 미술과 비잔틴 미술 중세의 미술 - 1. 초기 기독교 미술과 비잔틴 미술 이 글에 대한 원문 포스트 : http://blog.naver.com/tori2984?Redirect=Log&logNo=10013241401 위 블로그를 클릭하시면 유럽 미술사에 대한 많은 자료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유럽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미술사를 정리하사는 것 같아요. 좋은 글들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위 사이트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제가 정리하는 것보다 100배는 나은 듯 하네요. 역시 제 사이트는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해요. 근데, 마우스 방지 스크립트랑, 그림 개체 방화벽이 있어서 가져오는 게 더 어렵더군요. 차라리 포스트를 작성하고 말지.... 하지만 넘 좋은 글이라서 탐이 나더군요. 그래서 그림은 일일이 캡쳐했습니다.. 더보기
위진남북조의 토지제도 분석 : 둔전제, 점전제, 과전제, 균전제 위진남북조의 토지제도 분석 : 둔전제, 점전제, 과전제, 균전제 이번 장에서는 북위의 토지제도인 균전제도에 대하여 심도있게 다루어 보겠습니다. 북위의 균전제도는 이후 포스팅 될 당나라의 와 비교해서 파악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하네요. 이후 당나라의 에서도 북위 균전제를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1. 중국 전통의 은 계속되어야 한다. 북위의 토지제도를 다루기에 앞서 한나라 멸망 후 토지제도의 변천을 간략히 다뤄보겠습니다. 한나라는 한무제의 으로 상인들이 호족화 현상이 심화되었습니다. 실제 후한은 지방의 토지와 군사를 가진 호족들이 연합한 이었고, 왕망의 신이 멸망한 것도 때문이었습니다. 후한말 황건적의 난의 원인도 에 대한 반발이 원인이 되었고, 이 황건적을 진압한 자들도 인 조조, 원소, 동탁 등이었습니다. .. 더보기
드라마 주몽 : 고대 서사 구조 vs 리니지적 게임 구조 - 이들이 결합하다! 주몽이 끝났네요. 주몽 드라마를 다시 생각해보니, 역사를 보았다기 보다는 한편의 대하서사 문학을 본 느낌이 많이 듭니다. 드라마가 역사가 될 수 없지만, 역사적으로 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뭔가 포스트 하나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글은 말도 안되는 글이지만, 솔직히 보다가 이런 부분들이 눈에 띄어서 그냥 적어봅니다. 1. 주몽의 설정은 고대 서사적 구조의 현대적 해석... 처음부터 주몽을 못봐서 초반 20부 정도는 인터넷에서 다운받아서 보았습니다. 한 번에 10시간씩 시간을 내서 몰아보았더니, 그 구도가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더군요. 초반 주몽의 구조는 고대 서사 구조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대 영웅의 구조는 보통 이라는 단계로 나가곤 합니다. 저는.. 더보기
남북조의 귀족 2 - 귀족사회로의 전환되다 남북조의 귀족 2 - 귀족사회로의 전환되다 1. 한대 호족은 를 원칙으로 하였다 원래 호족은 지방에서 대토지와 무력을 가진 세력을 뜻한다는 것을 지난 포스트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이 호족들은 전한시대에는 속에서 대두되는 향촌 세력으로서 객, 문생, 고리, 부곡 등과 연결되었고, 노비를 통해 생산력을 확보한 계층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중앙관계에 진출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전한 시대 외척과 환관의 싸움이 치열하였고, 이들은 지방에서 묵묵히 세력을 키우고 있었죠. 이들은 후한 광무제 정권 이후에 크게 대두합니다. 후한 정권 자체가 호족연합정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제 을 붕괴시키고, 향촌 사회의 지배자로 나서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향거리선제를 통하여 호족의 추천으로 지방 사회를 장악해 나갑니다. 보통.. 더보기
남북조의 귀족 1 - 호족의 성립과정과 호족의 개념 중국사에서 호족의 개념과 성립 배경 이번 장에서는 호족이란 무엇이며, 이들이 어떻게 등장하였고, 어떻게 발전해나가는지, 후한 말기부터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다뤄보겠습니다. 이라는 개념은 동아시아사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개념이나, 한국, 일본에서는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중국사에서 자세히 다루는 이유는 이 짧은 개념의 배경을 좀 더 상세히 알기 위함입니다. 1. 토지를 가진 자들이 사회세력화 하다 한 무제가 강력한 경제 통제책을 사용하여, 국가 재정과 황실 재정을 늘려나가자, 대상인들은 그들이 가진 부를 로 돌려 버리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가 곧 재산이라는 인식이 늘어나서, 대토지를 가진 자들이 사회전반에 확산되었습니다. 실제 한무제기에는 장건의 서방 실크로드 개통,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 오.. 더보기
서임권 투쟁 4 - 서임권 문제 총정리 서임권 투쟁 4장 - 서임권 문제 총정리 지난 장에서 서임권 문제의 배경은 수도원 개혁운동으로, 서임권 문제의 핵심 사안은 토스카나 가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마지막 장에서는 서임권 문제를 학문적 입장에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서임권 문제의 배경 서임권 문제의 배경은 성직자 임명권이 에게 넘어간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세속 제후가 서임권을 가진 것은 중세 전체의 사회적 변화에서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즉, 노르만 등의 이민족 침입으로 혼란해진 서유럽은 라는 유럽 중세 특유의 제도를 성립시켰고, 봉건제도에서는 등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영지 지배체제(지방분권체제)가 일반적이었습니다. 따라서 각급 하부단위 교회는 봉건제도의 장원안에 설립된 관계로, 영주의 지배체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 더보기
서임권 투쟁 3 - 서임권 투쟁의 배경 : 중세 수도원과 수도원의 개혁운동 중세 수도원과 수도원의 개혁운동 이번 장에서는 중세 수도원과 수도원이 실시한 교회 개혁운동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간단한 글이 되겠네요. 1. 중세의 수도원 수도원은 기원후 4세기 로마에서 등장한다고 합니다. 4세기 서로마가 멸망할 무렵에 혼잡하고, 타락한 교회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수도원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고, 수도원의 계율은 정절, 복종, 청빈, 검약 등이었다고 하네요. 이 수도원은 로마의 변방이나, 동로마 쪽에서 새로운 개념의 교회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3세기 성 안토니오, 4세기 성 바질 등의 성인들이 이끌었다고 합니다. 6세기에 본격적인 수도원이 등장하는데, 성 베네딕트 수도원이라고도 불리는 입니다. 베네딕트가 세운 이 수도원은 청빈, 복종, 정결 등을 .. 더보기
서임권 투쟁 2 - 그레고리우스 7세의 승리, 하인리히 4세의 복수, 마틸다의 재복수 하인리히 4세와 철의 여인 마틸다 - 그들의 복수와 재복수 1. 하인리히 4세의 복수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을 새로운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카노사의 굴욕은 육체적 치욕일 뿐, 히인리히가 황제권을 잃은 것도 아니였습니다. 그리고 한번 머리숙여 빌어서 교황에게 파문당한 것도 회복되었으니까요. 황제를 견제하던 영주들도 교황이 황제를 (비록 치욕적인 굴욕이었지만) 용서함으로서 더 이상 황제를 몰아붙일 구실을 잃었습니다. 훗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후회하게 됩니다. 독일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를 폐위하려고 했지만, 교황이 황제를 용서함으로서 우왕좌왕하게 되었고, 독일은 서로 죽이고 죽이는 내전상태에 빠졌습니다. 교황은 후회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인리.. 더보기
서임권 투쟁 1 - 카노사의 굴욕, 그 전말과 토스카나 가문 중세 서임권 투쟁과 카노사의 굴욕, 그리고 토스카나 가문 1. 로마의 몰락과 중세의 시작 로마가 몰락하면서 고대는 끝나고 중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점차 옛 로마의 영광을 잊어가기 시작합니다. 2백만이 넘는 고대 초호화 도시 로마는 게르만과 노르만의 침입 이후 인구 2만에 불과한 추억의 도시로 전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의 역사가인 프로카치는 로마의 역사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 동안의 경위를 설명하자면 복잡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드높이 쌓아올렸던 것들이 끝도 없이 무너져서 소멸해갔다. 로마 제정 말기의 엄청난 경제, 사회적 위기와 이민족의 침입, 그리고 6세기 고트족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 이탈리아를 망가뜨렸다. 그리고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에 남하하여 정착하였다. 이러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