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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한나라의 문화 : 동아시아 문화권으로 나아가다 한나라의 문화 : 동아시아 문화권으로 나아가다 이번 장에서는 한나라 한무제 이래 중국 문물이 동아시아로 전파되는 계기를 아주 간단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1. 한나라 시기 문화권의 대립 중국 고대시기에 아시아의 문화권은 큰 틀을 말하지만 4개로 나누어 보곤 합니다. 하나는 중국문명(동아시아 문화권), 다른 하나는 인도문명(남아시아 문화권), 다음은 페르시아 문명(서아시아 문화권), 마지막으로 흉노 문화권(북방문화권)입니다. 이중 고대 중국 문화권이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만나야 했던 문화는 바로 북방 문화권입니다. 이 때의 북방 문화권은 흉노로 대표되는 유목문화권으로서 중국과 대등한 세력을 갖춘 하나의 독자세계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아시아 문화권을 중심으로만 파악하지만, 실제 아시아 문화권, 심지어 중국 .. 더보기
중국사 이야기 41 - 한무제의 국가재정 장악 정책 중국사 이야기 41 - 한무제의 국가재정 장악 정책 중국 한나라의 이야기는 절반 이상이 한무제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고대 사회에서 황제지배체제를 완성하였고, 그 과정에서 중국의 유교, 불교, 율령, 한자 체제를 정비하여 동아시아 문화권의 기틀을 잡았습니다. 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면에서 중국 고대의 전통을 정리하고, 이후 중국체제의 기반을 잡았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들을 알면 중국 전반의 제도와 사상이 눈에 잘 들어옵니다. 이번 장에서는 간략히 한무제의 재정 장악 정책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황실재정은 국가 재정에 포함되지 않는다. 한무제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지배체제를 완성하였습니다. 물론, 이전부터 진시황이 시도한 정책이긴 하지만 진시황은 실패했었고, 실제 황제지배체제를 완성한 사람은.. 더보기
중국사 40 - 황건적의 난과 후한의 멸망 중국사 40 - 황건적의 난과 후한의 멸망 이번 장에서는 후한말기 황건적의 난을 간략하게 다루겠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짧은 글이 되겠네요. 1. 황건적의 난의 사상 황건적이 일어난 이유는 후한시대 중앙과 지방에서 전면적으로 백성들을 압박하는 지배층 위주의 정치가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중앙에서는 어린 황제가 계속 등극하면서 국가적 차원의 실제 정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세금을 걷는 횟수만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환관들은 외척과의 싸움에 몰두하여 민생은 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호족들은 대토지를 사유화하여 백성들을 괴롭했습니다. 거기에 왕조말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천제지변과 기아, 홍수 등의 악조건들이 농민들을 토지에서 유리시키고, 농민들을 초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황건적의 난은 일단 음양오행사상.. 더보기
중국사 39 - 후한의 건국과 멸망에 대한 이야기 중국사 39 - 후한의 건국과 멸망에 대한 이야기 이번 장에서는 후한시대의 건국의 의미와 멸망까지의 역사를 한번 다루어보겠습니다. 후한은 기원 후 25년에서 220년까지의 왕조입니다. 1. 호족연합정권의 성립 왕망의 신이 지나친 국가통제적 정책을 실시하면서, 사회 전반의 모든 세력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호족들은 토지에 대한 규제 정책이 싫었고, 대상인들은 상공업 규제정책에 불만을 가졌으며, 농민들은 새로운 제도가 오히려 사회 불안을 부추기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왕망이 죽을 무렵 시작된 전국 각지에서의 농민 봉기는 수습이 안될 지경이었습니다. 특히 반왕복한(왕망을 죽이고 한을 부활하자)는 구호를 위친 적미의 난(붉은 눈썹의 난)은 중국 각지에 번지고 있었습니다. 이전까지 계속 이야기 했지만, .. 더보기
중국사 이야기 38 - 왕망의 신(AD. 8~23)도 역사적 의의가 큰 왕조였다. 중국사 이야기 38 - 왕망의 신(AD. 8~23) 이번 장에서는 짧지만 역사적 의의가 꽤 있는 왕망의 신나라에 대한 중요 개념들을 짧게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1. 신 건국의 배경 왕망은 외척출신입니다. 신이 건국된 배경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한나라의 내조와 외조가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투쟁하던 외척과 환관 세력의 다툼이 곧 신의 건국 배경입니다. 왕망은 이 싸움에서 환관을 몰아내고 외척으로서 새로운 나라인 신을 건국한 것이지요. 자세히 볼까요? 왕망의 이복동생인 왕씨가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엔 황후가 되어 버렸죠, 왕망과 그녀의 여동생인 황후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당시 왕인 성제는 황황후의 아들로서 왕망의 사촌이었습니다. 성제는 외척 중 4명을 뽑아 돌아가면서 정치를 하.. 더보기
중국사 이야기 37 - 한나라 시대의 제도사 : 중국엔 자사? 조선엔 관찰사! 중국사 이야기 37 - 한나라 시대의 제도사 이번 장에서는 중국 한나라의 정치 제도에 대하여 간략하게 포스트하겠습니다.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그냥 순서대로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 봅니다. 1. 한의 중앙제도 한나라의 제도는 진의 3공 9경제를 중심으로 합니다. 그러나 진나라와 같이 3공 9경이 황제권 강화에 이용되면서도, 상대적으로 그 권한은 약간 약화되는 쪽으로 제도정비 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3공의 역할 1. 승상 : 어사대부가 승상을 적극적으로 견제할 역할이 커져서 승상이 권한이 약화되었습니다. 2. 태위 : 군사권을 황제가 장악하려고 하여 태위의 군사권 기능이 약화되었습니다. 3. 어사대부 : 승상, 태위를 감시하는 기능이 대폭 강화되어 황제권과 좀 더 밀착됩니다. 바로 이 어사대부.. 더보기
중국사 이야기 35 - 한 무제 사후 내외조의 대립과 전한의 멸망 중국사 이야기 35 - 한 무제 사후 내외조의 대립과 전한의 멸망 이번 장에서는 한무제가 죽은 직후 황제권의 약화와 전한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어보죠. 1. 한무제가 만든 외조, 내조의 문제점 한무제는 자신의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기존 국가 지배 기구인 진시황제 이래의 외조를 통제하였습니다. 즉, 황제권에 도전할 수 있는 강력한 외조 기관인 3공을 통제한 것이지요. 따라서 승상(재상), 어사대부(감찰), 태위(군사)라는 삼권은 이전보다는 상당히 약화된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반면, 황제는 자신의 최측근에서 일할 수 있는 비서기관인 상서, 중서라는 기관의 의 권한을 느렸습니다. 무제는 자신들의 측근인 조신(상서, 중서, 중시)들과 국사를 의논하여 처리하였고, 이러한 황제 측근 기관을 흔히 라고 합니다.. 더보기
7번의 십자군 원정 : 후진 유럽이 아시아사회 수준으로 올라서다 7번의 십자군 원정 : 후진 유럽이 아시아사회 수준으로 올라서다 앞 포스트에서는 십자군 원정이 이베리아 정복과 시칠리아 정복사업 등이 바탕이 된 교황의 프로젝트 사업이라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럼 이제 실제로 십자군 원정 과정을 간략히 살펴볼께요. 1. 1차 십자군 1차 십자군은 교황 우르반 2세가 강력한 교황권을 바탕으로 가장 열정적으로 추진하였던 십자군입니다. 우선 선발대로 농민 십자군이 출정하였습니다. 이들은 교황의 말에 혹하여, 천국에 갈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혹은 토지를 얻기 위해서, 혹은 자유민이 되거나 부채를 감면받기 위해 예수의 고향으로 출정한 것이지요. 요즘 TV에서 나오는 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 때는 사회분위기가 모두 십자군 출정에 대한 환상적 광고를 때리는 분위기였습니다.. 더보기
십자군 전쟁의 배경 : 십자군 전쟁은 교황이 애초 기획한 프로젝트 사업이였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부터 거의 200년간에 걸쳐 서유럽 세계와 이슬람 세계가 정면으로 충돌하였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배경을 이번 장에서 다루어 보겠습니다. 1. 왜 십자군 원정을 해야 했는가? 십자군 원정을 유럽이 강행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항은 유럽인의 때문입니다. 서유럽은 11세기 이전에는 주변 아프리카,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에 비해 너무나 후진지역이었습니다. 5세기 이후 게르만의 침입으로 서로마가 망하면서 성립한 중세는, 9세기 이후 남으로는 이슬람 제국의 침입으로 지중해와 남부 유럽을 잃었고, 북으로는 노르만족(바이킹)의 침입으로 홍역을 치루었으며, 동으로는 마자르족과 흉노족 등 아시아계 민족의 준동으로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 중심을 잡아.. 더보기
11세기 - 13세기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유럽세력과 이슬람 세력의 항쟁의 역사 11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재정복 운동 이번 장에서는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었던 이베리아 반도를 서유럽 국가가 재탈환하는 시기의 역사를 다뤄볼까 합니다. 이 지역의 역사는 교과서든, 어디든 다 서유럽의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슬람 세력을 유럽이 몰아내고, 크리스트교 세계를 복구하였다라는 것이 이 파트의 내용인데, 상당히 불만입니다. 이슬람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닐텐데요. 하지만, 제 주관을 배제하고 중세 유럽사의 내용에서 이 파트를 다룬 뒤 이슬람사에서는 이슬람의 입장에서 이 파트를 다른 관점으로 다루겠습니다. 1. 이베리아 반도의 상황 11세기 이전까지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 국가가 지배하였습니다. 7세기 이후 마호메트의 이슬람 세력이 그 위세를 떨칠 무렵 이슬람은 전 유럽을 이슬람의 영역으로 만들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