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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상왕 대 재상 창조리 고구려 봉상왕 대 창조리 이야기 창조리는 고구려 사람으로 봉상왕 대 국상인데, 이 때는 모용외가 강성하여 걱정거리였던 때였다. 왕이 군신들을 모아 말하기를, 이에 창조리가 대답하며 말하였다. 더보기
고구려 초기의 왕권 강화 과정 고구려 초기의 왕권 강화 12월, 왕이 질산의 북쪽에서 사냥을 하면서 닷새가 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대부인 협부가 간하되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기어 백성들이 아직 안심하지 못하고 사니 마땅히 나라 일에 마음을 부지런히 쓰실 때 입니다. 그런데 이는 생각지 아니하고 사냥에만 몰두하시니, 만일 잘못을 고쳐 스스로 새로운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정치가 문란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서 선왕의 업적이 땅에 떨어질까 염려됩니다.'고 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협부의 벼슬을 빼앗고 관아의 장원을 관리하게 하였더니, 협부가 분하게 여겨 남쪽의 한(韓)으로 달아났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 3월 고위 관리인 구도, 일구, 분구 등 3인을 내쫓아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이 3인은 비류부의 장이었는데, 그 바.. 더보기
고구려의 조세 제도 고구려의 조세 세금은 명주, 베 및 곡식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종류에 따라 빈부의 차등을 헤아려 받아들였다. - 주서, 이역열전 고구려 - 한 사람이 내는 세금이 포목 다섯 필에 곡식 다섯 섬이며, 일정한 일이 없는 떠돌이는 3년에 한 번 세금을 내는데 열 사람이 함께 고운 포 한 필을 낸다. 조는 상호(上戶)는 한 섬이고 그 다음은 7말이고 하호는 5말을 낸다. - 수서 동이열전 고구려 - 자료 참조 : 고구려의 세금은 일정한 금액을 내는데, 빈부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단 세금은 고대 대부분의 국가가 그렇듯이 인두세 위주입니다. 사람 수에 따라 세금을 매겼습니다. 토지에 따른 세금은 따로 계산하였는데, 공동경작인 전사법이라는 것이 있었고, 경무법이라고 해서 풍흉과 관계없이 일정 토지에서.. 더보기
고구려의 법 체제 고구려의 법률 법률을 보면, 반란을 꾀하는 자가 있으면 많은 사람을 불러모아 놓고, 횃불을 들고 서로 앞다투어 지지게 하여, 온몸이 진무른 뒤에 목을 베고 집의 재산은 몰수한다. 성을 지키다 항복한 자, 전쟁에서 패배한 자, 사람을 죽이거나 겁탈한 자는 목을 벤다.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그 물건의 l2배를 물어주게 하고, 소나 말을 죽인 자는 노비로 삼는다. 대체로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므로 범하는 자가 적으며, 심지어는 길가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는다. - 구당서 동이열전 고구려 소나 말을 죽인 자는 소나 주인 집의 노비로 삼는다. - 구당서 동이 열전, 고구려 - 도둑질한 자는 도둑질한 물건의 l0여 배를 징수하였다. 만일 집이 가난해서 이를 갚을 수 없거나 공적 사적으로 빚을 진 자는 모두 그 자녀.. 더보기
고구려의 정복 전쟁과 영토 확장 사료 고구려의 영토 확장 동명성왕 2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니 그 땅을 다물도로 삼고 송양을 그 곳의 주로 봉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 부여왕 사촌 동생이 만여명을 데리고 투항해 오니 대무신왕이 왕으로 봉하고 연나부에 안치시켰다. 9년 10월에 왕이 친히 개마국을 정벌하여 왕을 죽이고 백성을 위로하여 노략질을 못하게 하고 군현으로 삼았다. 12월에 구다국왕이 개마가 멸망했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 태조대왕 11년 8월에 갈사왕 손도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니 도두를 우태로 삼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 - 9월, 왕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현도군에 침입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 더보기
담징 - 일본에 문물전파 일본에 문물전파 - 담징 고려왕이 승려 담징(曇徵)과 법정(法定)을 바쳤다. 담징은 5경을 알고 또한 채색 및 종이와 먹을 만들 수 있었으며, 아울러 연자방아를 만들었다. 대개 연자방아를 만드는 것은 이 때 시작된 듯하다. - 일본서기 - 자료 참조 : 고구려 문물의 일본 전파에 관련한 명백한 증거입니다. 일본서기는 4세기에 만들어진 책인데, 특히 신공황후편에 임나일본부설 관련 근거들이 많아 일본의 한반도 고대사 왜곡에 많이 이용하는 자료입니다. 문제는 이 책에 당시 라고 표기되어야 할 용어들이 당시 없었던 이라는 말로 표기된다는 점 등 믿을 수 없는 내용들이 많아 신빙성에 문제는 많습니다. 더보기
고구려의 태학과 불교수용 사료 고구려의 교육제도와 불교 수용 2년 여름 6월에 진나라 왕 부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 왕은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태학(太學)을 세우고 자제(子弟)를 교육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 습속에 문지기와 말먹이 따위의 집에 이르기까지 서적을 매우 좋아한다.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이라 부르는데, 자제(子弟)들이 결혼할 때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힌다. 책은 오경(五經)과 사기(史記), 한서(漢書)와 범엽의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와 손성(孫盛)의 진춘추(晋春秋), 그리고 옥편(玉篇)· 자통(字統)· 자림(字林)이 있다. 또 문선(文選)이 있는데 이를 가장 귀중하게 여긴다. - 구당서 열전 동이 고려 - 태학박사(太.. 더보기
고구려의 대대로 선임 체제 고구려의 대대로 관직은 모두 12등급이 있다. 대대로(大對盧)는 혹은 토졸이라고도 하며 국정을 총괄한다. 3년에 한번씩 바꾸는데, 직책을 잘 수행하면 바꾸지 않기도 한다. 무릇 교체하는 날 불복(不服)하는 자가 있게 되면 서로 싸움을 하는데, 왕은 궁문을 닫고 지키기만 하다가 이긴 자를 인정해 준다. 그 아래로는 울절로 호적과 문서를 관장한다. 다음은 태대사자이다. 다음은 조의두 대형으로서 이른바 조의는 선인을 말한다. 다음은 대사자이다. 다음은 대형, 다음은 상위자사, 다음은 제형, 다음은 소사자, 다음은 과절, 다음은 선인, 다음은 고추대가이다. -신당서 열전, 동이 고려 - 대대로는 세력의 강약으로 서로 싸워서 차지하는 것이니 스스로 대대로가 되는 것이지 왕의 임명을 거쳐서 두는 자리가 아니다. -.. 더보기
고구려와 당과의 전쟁 관련 사료 고구려와 당의 전쟁 (당태종)은 형부상서 장량(張亮)으로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을 삼아 강*회*영*협의 병사 4만을 거느리게 하고, 장안과 낙양에서 병사 3천을 모집하였으며, 전함 500척은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또 이세적(李世勣)으로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을 삼아 보병과 기병 6만과 난주와 하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게 하니, 양군은 합세하여 유주(幽州)에 집결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군사를 독려하여 안시성의 동남 구석에 토산(土山)을 쌓고 성을 압박하니 성 안에서도 성의 높이를 더하여 막았다. ... 도종은 주야로 쉬지 않고 60여일, 연인원 5만을 동원하여 토산 쌓기를 계속하여 성 안을 아래로 굽어보.. 더보기
고구려와 수와의 전쟁 사료 - 을지문덕의 오언시, 살수대첩 포함 고구려와 수의 전쟁 이듬해 원이 말갈기병 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에 침입하였는데, 영주들이 총관 위충을 물리쳤다. 수나라 고조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양을 원수로 삼고 수군과 육군을 총동원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는 한편, 조서를 내려 고구려왕의 작위를 빼앗았다. 그러나 이때 군량 수송이 중단되어 6군의 먹을 것이 거의 떨어지고, 군대가 임유관을 나오자 전염병마저 번져 수나라 군대는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 수서 동이열전, 고려 - 양제(煬帝)가 조를 내려 고구려 공격을 명하였는데, 그 병사의 수는 모두 113만 3,800인이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을지문덕의 오언시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궁구하였고(神策究天文) 기묘한 계획은 지리를 통달하였구나(妙山窮地理) 싸움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 더보기